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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다산 정약용..

.ⓒ 2014. 4. 2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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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다산 정약용..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라 불린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 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다산 정약용 출생과 배경..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년(헌조 2년)에 죽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로 지금의 행정 명으로 하자면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 세력을 잃고 있던 남인 계열이었으므로 그의 고조부로부터 조부까지는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8대에 걸쳐 줄곧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해온 명문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도세자가 폐세자되고 뒤주에 갇혀죽은 해였다. 이후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남인)와 반대하는 벽파(노론)로 나뉜다. 시파와 벽파의 싸움은 그 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정약용 자신의 생애에도 깊은 그림자를 던졌다.



정조가 똑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성리학 분야에 뛰어났기 때문에 신하들을 오히려 가르칠 정도였는데

정조는 정약용과의 성리학토론에서 한 번도 이겨본적이 없다고 함. 

1000여권의 유교경전을 놓고 연구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음. 

이미 7살 부터 시를 지었고('산'이라는 시가 전해짐) 10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냄. 농민의 참상이나 사회현실을 한시로 지으면서 조선후기의 한시에 영향을 끼침. 

또한 어린시절 홍역을 치료해준 이헌길이라는 의사의 전기(몽헌집)를 집필함. 



사의재.. 전라남도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를 저술했던 유적지..



예전 1박2일에서 김종민이 다산 정약용의 시 애절양을 읽다가 굴욕당하는 장면..


다산 정약용을 다쓰 정약용으로 읽은 김종민.. ^^;;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다산 정약용


성장기 

1762년 ~ 1782년

경기도 광주 출생.

영조의 탕평책 실시로 한양으로 올라옴.

이벽, 이가환 등과 교류하며 서학(천주교)에 눈뜸.


관직기(18년)

1782년 ~ 1801년

과거에 합격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음

배를 띄워 다리를 만들고, 수원 화성의 설계를 맡아 거중기를 사용하여 화성을 짓는데 기여함.

천주교에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공격을 받음.


유배기(18년)

1801년 ~ 1818년

정조 사망 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됨.

1801년 두 형과 함께 투옥된 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남.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저술에 몰두함.


집필기(18년)

1818년 ~ 1836년

유배가 풀린 후 고향으로 돌아와 유배 생활 때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함

"여유당전서" 259권, "다산총서" 246권 등 500여 권을 저술함.

1836년 사망




 

정약용 선생 曰 :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목민관은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을 편히 살게 해주고 죄 지은 사람을 붙잡아 죽이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권한을 사람이 대신 행사하는 것이다. 사람이 천권을 대신하면서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른 채 자세히 헤아리지 않아,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러고서도 태연하고 편안할 뿐 아니라, 비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도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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